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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43. <부정공>순천향교전교휘창열공적비문(順天鄉校典校諱昶烈功績碑文)
1. 문헌 목록 〉22. 22世 〉45. <부정공>송촌공휘연경행장(松村公諱淵璟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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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부정공>우헌처사휘연호묘갈명(愚軒處士諱淵鎬墓碣銘)
愚軒處士諱淵鎬墓碣銘 崇昔鄉邦咸有學而推其篤行君子謂之鄉先生生有養而歿有述所以敦俗而成敎也降及衰季學絶敎異耆德之士隠居求於人以余所見若處士趙公殆其人乎公諱淵鎬愚軒其號也趙氏世爲玉川人遠祖忠獻公諱元吉以勳封玉川府院君是生諱瑜高麗副正當麗運之將訖盡瘁其所守臣道畢備者固己埵諸册書享謙川祠杜門院自後子姓繁衍圭組炳煥爲東方之巨姓是所謂根固而枝茂源深而流遠者非耶然而尚幸卿雲瀾漫故名位碩德源源相續而大司成諱琛統制使爾重最著焉高祖諱秉彧曾祖諱得烈祖諱廷英考諱裕鉉皆有文行隱德不仕妣延安金氏達秀女擧一男卽公也生禀英粹長益沈靜從師力學文藝夙就同門之士莫或先焉其於事親有至性親齋不能食輒對案涕泣嘗藥嘗糞靡不用極其養大抵以養志爲本而甘旨之供不以貧寠而或闕執喪哀戚過禮啜粥終制隆耋思慕不哀遇先忌自致齋不御酒肉哭泣如祖括日必晨謁家廟危坐靜室鑽硏經籍專治小學曰人生百也歲此一書撮其功要揭左右誦法焉甲寅六月二十二日卒距其生高宗庚辰年壽九十四葬于住岩面屯垈所居家後麓子坐原配慶州鄭氏海朝女戊寅七月十六日生其在室己有異操抄錄女史言動以自鏡攷及歸趙門内外皆法拂惎有閨闔之譽己未十二月四日卒墓住岩面烏院村左麓高祖塋下艮坐原男東起孫達勳昌勳庸勳重勳也曾玄不錄噫公之之德之行宜乎席上珍而卒老于林泉是爲識者之慨歎也己公之孫達勳抱狀請銘其懇誠篤不敢以不文終辭誠敬有銘銘曰孝悌爲質本立道生爲政于家厥敎内成曰有所受克肖典型學力既充迺著令名報在不食惟後之贏有鬱星峙有侐佳城有來永世不泐 斯銘 檀紀四千三百二十年丁卯仲春 傍裔 東貴 謹撰 推進委員 外孫 柳寅昌 鄭亨燮 仁煥 陳洪郁 洪寅 洪校 洪柱 文丞萬 丞連 丞河 우헌처사휘연호묘갈명(愚軒處士諱淵鎬墓碣銘) 옛날에는 향리와 나라에 모두 학교가 있었는데, 행실과 학문이 독실한 군자(君子)를 추천하여 향선생(鄉先生)이라 불렀으며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으면 기려주었으니 이는 풍속을 돈후(敦厚)하게 하고 교육을 잘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다가 말세(末世)에 내려와서는 학문이 끊어지고 교육(敎育)이 달라져 덕망있는 선비들이 은거(隱居)하게 되었으니 내가 보기에 처사 조공이 그런 사람이다. 공의 휘(諱)는 연호(淵鎬)요 우헌(愚軒)은 호(號)이다. 옥천조씨(玉川趙氏)로 원조(遠祖)는 충헌공(忠獻公) 휘(諱) 원길(元吉)인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훈봉(勲封)되었으며 그분이 휘 유(瑜)를 낳으셨는데 고려 때 부정(副正)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게 되자 절의(節義)를 지켜 신하의 도리를 다한 것은 나라의 여러 책에 실려 있으며 겸천사(謙川祠)와 두문원(杜門院)에 배향(配享) 되셨다. 그후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아치가 계속 나와 우리 나라의 거성(巨姓)이 되었으니 이는 이른바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어야 물이 길게 흐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훌륭한 자손이 많기 때문에 유명한 석덕(碩德)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대사성(大司成) 휘 침(琛), 통제사(統制使) 이중(爾重)이 그 가운데서도 가장 드러난 인물이다. 고조의 휘는 병욱(秉彧)이요 증조의 휘는 득렬(得烈), 할아버지의 휘는 정영(廷英), 아버지의 휘는 유현(裕鉉)인데 모두 문학과 행실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않으셨다. 어머니 연암김씨(延安金氏)는 달수(達秀)의 따님으로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공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자라면서는 더욱 침착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에 힘을 쏟아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어 함께 배우는 자들이 공을 앞서지 못하였다. 부모님을 지성으로 섬겨 어버이가 병환이 나면 자신도 밥을 먹지 않고 밥상 머리에 앉아서 울고, 손수 약을 맛보고 대변까지 맛을 보는 등 봉양하는 데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효도를 하는 데는 뜻을 받드는 것을 위주로 하고 맛있는 음식을 집이 가난하다고 하여 거르는 일이 없었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禮)를 지나치게 하여 3년 동안 죽을 마시며 탈상하였다. 늙어서도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줄지 않아 제삿날을 당하면 재계(齋戒)하면서 술과 고기를 들지 않고 마치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하였다. 날마다 새벽이면 사당(祠堂)을 배알하고 나서 단정히 앉아 경서를 연구하면서 말하기를 「인생 백세(百歲)를 살면서 이 책이 가장 중요하다.」 하고는 좌우에 써붙여 놓고 외웠다. 갑인년 六월 二十三일에 돌아가시니, 태어난 고종(高宗) 경진년(一八八○)부터 九十四세의 수(壽)를 누린 것이다. 주암면 둔대리(屯岱里) 살던 집 뒤 자좌(子坐) 언덕에 장례(葬禮)하였다. 배위(配位) 경주정씨(慶州鄭氏)는 해조(海朝)의 따님으로 무인년 七월 十六일에 출생하였는데 집안에서 뛰어난 행실이 있었으며 옛날 훌륭한 여사(女史)들의 말을 뽑아 적어놓고 자신의 귀감(龜鑑)으로 삼았다. 그래서 문중은 물론 안팎에서 모두 본을 받아 칭찬이 자자하였다. 기미년 十二월 四일에 돌아가셨는데 묘는 주암면 오원촌(烏院村) 왼쪽 기슭 고조(高祖) 묘 아래 간좌(艮坐) 언덕이다. 아들은 동기(東起), 손자는 달훈(達勳) 창훈(昌勳) 용훈(庸勳) 중훈(重勳)이며 증손과 현손은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덕행은 마땅히 자리 옆에 적어놓아야 하는데 시골에서 늙어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식자(識者)들이 개탄(慨歎)하는 바이다. 공의 손자 달훈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간절하게 명(銘)을 청하므로 글을 못한다고 끝내 그 정성을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효제(孝悌)의 성품에다 孝悌爲質 근본을 두어 도(道)를 이루고 本立道生 집안을 잘 다스려서 爲政于家 안에서 가르침을 이루었네 厥敎内成 배운 바가 있었기에 曰有所受 훌륭한 모범 이루시고 克肖典型 학문이 충만하여 學力既充 아름다운 이름 드러났네 迺著令名 효성스러워 밥 먹지 못하고 報在不食 뒤에 넉넉해져 惟後之贏 많은 재산 쌓였네 有鬱星峙 이에 무덤을 돌보아 有侐佳城 영원히 전하게 하네 有來不泐 이에 명을 짓네 斯銘 檀紀 四三二O年 丁卯仲春 傍孫 東貴 삼가 지음 推進委員 外孫 柳寅昌 鄭亨燮 陳洪郁 文丞萬 仁煥 洪寅 丞運 洪敎 丞河 洪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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